왜 자살하지 않는가?
1.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 세계는 삼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정신은 아홉 개 또는 열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그것들은 장난이다. 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그런데 왜 카뮈는 왜 자살하지 않았을까?
2.
유시민씨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들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3.
그렇다면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나는 책을 사서 맨 먼저 여백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살고 싶어지는 내가 되길 바랍니다. 살고 싶습니다, 잘' 그리고 나서 머지 않아 왜 사는가에 대해 읽게 된 것이다.
나는 간절하게 삶을 갈구하지만, 거기에 타당한 이유를 댈 수 있는 사람인가? 각성하고 사는 사람인가? 하여 굳이 대답을 만들어내자면 나는 잘
죽고 싶어서 혹은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자살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겠다. 우선 나는 잘 죽고 싶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살고 싶고,
가슴보다는 몸으로 살고 싶다. 그러다 몸을 다 쓰고나면 감사하게 죽고 싶다. 우리는 살아온 만큼 죽는다. 그러니 잘 죽고 싶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잘 살고 싶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말은 곧 현재진행형이 된다. 나는 잘 살다가 잘 죽고 싶을 뿐, 그렇다고 영원불멸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게 자살하지 않는 이유로 충분할까? 하지만 이건 이유라기보다는 태도에 가깝다.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변태(變態)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모두 내안에 있는 재료들로. 애벌레가 번데기나 나비가 되듯.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꼭 그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환골탈태할
것이다. 그레고리 잠자처럼 바퀴벌레가 되거나 송혜교처럼 예뻐진다는 외모적 변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순간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자살하지 못하는 사람이 세계가 너무 궁금해서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는, 여태까지 살고 있다.
4.
마흔일곱 살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카뮈는 행동으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세상과 삶 그 자체가 부조리라고,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사형수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자살은 이 부조리를 알고 체념하는 것이다. 살아가려면
체념하지 말고 반항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모든 것을 소모하면서 살고, 이 해결할 수 없는 부조리와 끝내 화해하지 않은 채 죽어야 한다.
지금 이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있는 힘을 다해 살아야 한다.
-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